영화 내용
2023년 12월 20일 개봉
감독:김한민
필모:명량, 한산, 최종병기 활 연출
러닝타임:153분
등급:12세 관람가
영화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7년이 지난 1598년 12월을 왜군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조선에서 퇴각하려고 하였다. 대부분 조선의 신하들은 전쟁이 끝나다고 생각하며 이후 득실을 따지며 권력다툼을 하는데 급급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 사실을 알고 "절대 이렇게 전쟁을 끝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는 것이 이 전쟁이 온전하게 끝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조명연합함대를 꾸린다. 하지만 진린은 왜군의 뇌물에 넘어가 이순신의 계획을 저지하였고 왜군의 수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살마 군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함대를 관음포에 매복시키고 왜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조선 함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지만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고 전투를 계속 지휘한다. 결국 조선 함대는 왜군을 섬멸하고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게 된다.
영화 장면 알아보기
1.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순천왜성을 공략한 후, 고금도로 귀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고금도가 아니라 완도로 귀환했다.
2.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도독 진린과 협력하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진린이 이순신 장군의 계획에 반대하고, 명나라 함대를 노량에서 물러나게 했다.
3.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순신 장군이 적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4. 영화에서는 왜군의 수장 시마즈 요시히로가 살마 군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지만, 실제로는 살마 군은 시마즈의 부하인 나카가와 히데나가가 이끌었다.
5.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관음포에 함대를 매복시켰지만, 실제로는 관음포가 아니라 노량의 남쪽에 있는 해안가에 함대를 매복시켰다.
6. 영화에서 나온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정유재란 당시 고향 아산에서 이순신에 대한 보복으로 습격한 일본군에 항쟁하다 전사하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면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통해한 이순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난중일기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비하인드
1. 영화의 주연인 김윤석은 이순신 역을 위해 10kg 감량하였고 머리를 밀고 수영과 검술 등 특수 훈련을 받았다. 촬영 중에는 무거운 갑옷 때문에 코피가 나서 응급실에 갔다가 갑옷을 입고 다시 촬영을 이어갔다.
2. 유명한 작곡가인 이상준은 주제곡인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을 작곡하였고 가수 이석훈이 불렀다.
3. 영화의 촬영은 2022년 3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총 120일간의 촬영 기간 중 90일간은 바다에서 촬영되었다. 영화의 제작비는 200억원이 넘었으며 이중 80억 원은 바다 촬영에 사용되었다
영화 촬영은 날씨와 바다 상태에 영향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바다에서의 촬영으로 인해 피부염이나 감기 등의 질병에 걸리기도 했다.
4. 진린은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라며 통곡과 눈물을 흘렸고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진린은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운구하여 이순신의 고향 아산을 찾아갔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해진다.
진린의 손자는 청나라 때 식솔들을 이끌고 망명하고 조선은 특별공로를 인정하여 귀화를 받아 주었다.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 진 씨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